'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다시 읽다.
-사람이 남긴 무늬를 배우고 익혀, 다시 글로 새기는 일-
인문학(人文學)이란 무엇인가. 흔히 문학·역사·철학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알지만, 글자를 하나씩 짚어 보면 훨씬 단순하고도 깊은 뜻이 드러난다. 사람 인(人), 글월 문(文), 배울 학(學). 글자 그대로 사람이 남긴 글을 배우는 일이다. 그런데 글월 문(文)의 옛 글자는 본래 사람 가슴에 새긴 문신의 모양이었다. 그 처음 뜻은 ‘글’이 아니라 ‘무늬’였다. 『주역』 비괘(賁卦)는 이렇게 말한다.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관호천문 이찰시변 관호인문 이화성천하)』
하늘의 무늬를 보아 때의 변화를 살피고, 사람의 무늬(흔적)를 보아 천하를 변화시키며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천문(天文)이 별이 밤하늘에 그리는 무늬라면, 인문(人文)은 사람이 세상에 남기는 무늬다. 나무가 한 해를 살아 낸 만큼 나이테를 새기듯, 사람은 한 생을 묻고 답한 만큼 글을 새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남긴 무늬를 배우고, 그 물음의 답을 제 삶에서 익혀, 나이테처럼 다시 글로 새겨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일.
이 정의를 이천오백 년 전에 이미 세 문장으로 써 둔 사람이 있다. 『논어』의 첫 장, 학이편(學而篇)의 첫 구절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하나. 說, 깨쳐서 말할 수 있는 기쁨,
배우고 익히는 것이 왜 기쁜가. 이 물음에서 萬頭는 說이라는 한 글자에 오래 머물렀다. 전통적으로 이 글자는 ‘기쁠 열(悅)’과 같은 뜻으로 읽는다. 주자(朱子)도 “說은 기쁘다는 뜻(說 喜意也)”이라 풀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는 마음 심(忄)이 붙은 悅이라는 글자가 아직 없었다. ‘기쁘다’도 說, ‘말하다’도 說이었다. 한 글자 안에 기쁨과 말이 갈라지지 않은 채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후대가 悅을 만들어 기쁨만 떼어 내면서, 다른 한쪽의 뜻은 그늘로 물러났다.
글자의 뿌리를 더 파고들면 說은 말씀 언(言)에 바꿀 태(兌)를 붙인 글자다. 그리고 『주역』에서 兌는 바로 기쁨의 괘다. 태괘(兌卦)의 단전(彖傳)은 첫머리부터 “兌는 기쁨이다(兌 說也)”라고 말한다. 말과 기쁨은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
익힐 습(習)은 깃 우(羽) 아래에 흰 백(白)을 쓴 글자로, 어린 새가 날마다 날갯짓을 되풀이하는 모양으로 풀이한다. 날갯짓을 거듭하면 마침내 날 수 있듯, 스승에게 배운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뜻을 알기 어려워 거듭 익혔더니 어느 날 마침내 깨치게 된다. 깨쳤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에게 말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萬頭는 첫 구절을 이렇게 읽는다.
배운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뜻을 알기 어려워 거듭 익혔더니, 마침내 깨쳐 말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둘. 樂, 벗과 함께 짜 맞추는 즐거움,
둘째 구절에서 공자는 글자를 바꾼다. 說이 아니라 樂이다. 『논어집주』는 정자(程子)의 말을 빌려 이 차이를 짚는다. “說은 마음속에 있고, 樂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說在心 樂主發散在外).” 홀로 깨쳐 속에서 차오르는 것이 기쁨이라면, 그것을 벗과 나누며 밖으로 번지는 것이 즐거움이다.
찾아오는 이도 아무나가 아니다. 공자는 友가 아니라 朋이라 썼다. 한나라의 정현(鄭玄)은 “같은 스승에게 배운 이를 朋이라 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를 友라 한다(同師曰朋 同志曰友)”고 구분했다. 朋은 본래 조개 꾸러미 두 줄이 나란히 달린 모양이고, 友는 두 손이 맞잡은 모양이다. 같은 줄에 꿰인 사람, 같은 글을 읽은 사람이어야 내가 깨친 바를 알아듣고 함께 말을 맞출 수 있다.
『주역』 태괘의 대상전(大象傳)은 이 장면을 한 줄로 그려 놓았다.
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여택태 군자이붕우강습)
두 연못이 맞닿아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벗과 더불어 강습한다.
강론할 강(講)은 말씀 언(言)에 짤 구(冓)를 붙인 글자다. 冓는 나무를 가로세로로 엇갈려 짜 맞춘 모양으로, 얽을 구(構)·도랑 구(溝)·화친할 구(媾)에 모두 들어 있다. 그러니 講이란 혼자 늘어놓는 설명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이치를 짜 맞추는 일이다. 송나라 정이(程頤)는 이를 두고 “두 연못이 서로 적셔 주듯, 벗끼리 강습하면 서로를 이롭게 한다(朋友講習 互相益也)”고 했다. 기쁨(兌)과 벗(朋友)과 익힘(習)이 한 문장 안에 다 있다. 학이편의 첫 두 구절을 『주역』이 미리 풀어 둔 셈이다.
같은 스승에게 배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내가 깨친 바를 그와 함께 풀어 나눌 수 있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먼 곳’은 땅의 거리만이 아니다. 시간의 거리이기도 하다. 오늘 내가 남긴 글을 백 년 뒤 누군가 읽고 같은 물음을 품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먼 곳에서 찾아온 朋이다.
셋. 不慍, 알아주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넉넉함,
그런데 벗이 내가 깨친 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애써 짜 맞춘 이치를 들려주었는데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인다면. 공자는 성내지 않는 것(不慍)이 군자라고 답한다. 나이테는 누가 봐 주기를 바라며 생기지 않는다. 그저 한 해를 살아 낸 만큼 새겨질 뿐이다. 깨친 기쁨이 이미 내 안에 있고, 나누는 즐거움을 이미 누렸다면, 남의 인정은 덤일 뿐 그것이 내 깨침의 값을 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껄껄 웃을 수 있다.
벗이 내가 깨친 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배움은 안에서 밖으로, 다시 나에게로, 세 구절을 이어 놓으면 하나의 길이 보인다. 홀로 깨치는 기쁨(說)이 벗과 나누는 즐거움(樂)으로 번지고, 알아주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넉넉함(不慍)에 이른다. 배움이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순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문학이다. 사람이 남긴 무늬를 배우고(學), 제 삶에서 거듭 익혀(習), 벗과 말을 주고받으며 짜 맞추고(講), 그 깨침을 다시 글로 새겨 다음 사람에게 건넨다. 그 글을 받아 든 후세가 또 물음을 던지고, 제 삶에서 찾은 답을 다시 새긴다. 나이테가 한 겹씩 쌓여 나무가 되듯, 그렇게 쌓인 무늬가 인류의 정신이 된다.
공자가 『논어』의 첫 문장에 이 세 구절을 놓은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배움의 처음과 끝, 그리고 그것을 이어 가는 방법이 이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 萬頭의 객석, 권두안 J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