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르는 화살, 머무는 마음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인생도 그러하다. 백마과극(白馬過隙), 문틈 사이로 흰 말이 지나가듯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그 빠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그런데 고은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오를 때는 정상만 보였고, 내려올 때 비로소 곁의 꽃이 보였다는 것이다. 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없었던 것이다.
속도는 어쩔 수 없어도,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는 결국 마음의 문제다. 조식(調息), 숨을 고르는 그 짧은 틈에 의식은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멈출 수 없지만, 그 화살에 올라탄 마음은 방향을 돌아볼 수 있다.
장강의 물을 보라. 급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물줄기는 결국 더 큰 바다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이사(李斯)는 진왕에게 간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태산불사토양 고능성기대,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태산이 흙 한 줌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 큰 것을 이루었고, 강과 바다가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음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인재를 내치지 말라는 정치적 간언이었으되, 오늘 우리 삶에 옮겨놓아도 다르지 않다. 시류를 거부하지 않고, 만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오히려 그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저항하는 자는 부서지고, 포용하는 자는 흐른다.
그 장강의 물을 다시 보자. 사람들은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하고, 이를 세대교체라 부른다. 신사조가 구사조를 몰아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앞물이 있었기에 뒷물이 흘러갈 물길이 열린 것이고, 구사조가 있었기에 신사조가 태어날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터주는 것이다.
그래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법고창생(法古創生)이다. 온고지신은 앎의 문제다 —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아는 것, 곧 지식과 지혜의 영역이다. 법고창생은 행함의 문제다 — 옛것에서 얻은 지혜로 실제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곧 실행의 영역이다. 하나는 깨닫는 것이고, 하나는 짓는 것이다. 이 둘이 이어질 때 비로소 문명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보면 사라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음 것을 낳는 밑거름으로 쓰일 뿐이다. 우리가 자식을 낳고 자리를 물려주는 것도, 역사와 문명이 도전과 응전(挑戰과 應戰) 속에서 조금씩 진화해가는 것도 같은 하나의 이치다. 앞선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 오는 것 안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니 서러워할 이유가 없다. 억조창생(億兆蒼生), 우주에 가득한 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 섭리를 거스르지 못한다.
결국 화살은 멈추지 않고,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강물은 되돌아가지 않으며, 앞선 것은 뒤엣것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러나 그 흐름 안에서 숨을 돌리고, 곁의 꽃을 보고, 만나는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내가 물려준 것이 다음의 밑거름이 됨을 아는 마음 —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이자 위안이다.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 만두의 객석,권두안J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