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 한 모퉁이, 햇살이 잘 드는 담벼락 앞에서 문득 멈춰 선다.
그 벽은 오래된 빨간 벽돌로 지어져 있다.
시간이 쌓인 듯 벽돌의 틈마다 세월의 숨결이 배어 있고,
그 위로 나직하게 볕이 내려앉는다.
나는 그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대어 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벽돌의 온기가 등을 타고, 어깨를 타고,
곧 마음 한가운데로 번져든다.
거리도 따뜻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온기가 배어 있다.
모든 것이 변한 듯 보이지만, 그 따뜻함만은 예전과 같다.
빨간 벽돌에 기대면 잊고 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른다.
어제도 생각나고, 그제도 스며든다.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나를 진심이 머물던 그 시절로 데리고 간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삼형제를 자전거에 태우고 어디론가 데려가던 날들.
형은 뒤에, 동생은 형 앞에, 나는 아버지 품 앞에 앉아 있었다.
삐걱거리던 자전거 페달 소리,
뒤에서 들리던 형과 동생의 환호,
그리고 아버지의 콧노래.
나는 그 앞자리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무 말 없이도 마음이 가득 찼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았고
이마에 흐르던 땀 위로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바람이었다.
그 기억은 내 삶의 어느 페이지에 소중히 접혀 있다.
바쁜 하루 속, 차가운 시간 속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빨간 벽돌에 기대어 그 기억을 꺼내본다.
세상은 변해도 그날의 하늘, 바람, 콧노래는 그대로다.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세월을 먹고 더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
빨간 벽돌에 기대어 쉰다.
기억이 마음을 덮어줄 때까지,
잠시, 아주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