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팅 (The Sting) — 지도자의 연극, 국민의 지옥, 그리고 루비콘 강 너머의 침묵 —
1973년, 조지 로이 힐 감독의 영화 《스팅》(The Sting)이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석권했을 때, 할리우드는 단순한 사기극에 그 영예를 헌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영화가 담아낸 것은 인간의 탐욕, 허영,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얼마나 정교한 연극을 꾸며낼 수 있는가에 대한 냉혹한 우화(寓話)였다.
2026년 6월, 스위스 뷔르겐슈토크 호숫가에서 미국과 이란이 서명한 14개 조항의 양해각서(MOU)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문득 스콧 조플린의 〈The Entertainer〉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다. 이 곡은 영화 《스팅》에서 사기극이 한 단계씩 진행될 때마다 흐르던 바로 그 음악이다.
一. 무대의 막이 오르다 — 먼저 사람을 죽이고, 그 다음 협상을 한다
이 사건의 전말을 바로잡아야 한다. 협상이 먼저가 아니었다. 죽음이 먼저였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을 공습했다. 전쟁의 첫 번째 표적은 핵시설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 그 가족이 암살되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고위 군 지휘관들이 폭사했다. 수십 년간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과학자들이 한 명씩 제거되었다. 국가의 두뇌와 척추를 먼저 부수고, 그 다음 협상 테이블을 펴는 방식 — 이것이 이번 전쟁의 설계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의 포화 속에서, 트럼프는 2026년 들어서만 여러 차례 "합의가 임박했다"고 공언했다. 침공을 감행하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쏟아낸 여러 차례의 신뢰 없는 선언들이 모두 허공에 흩어진 뒤에야, 그는 마침내 이번 MOU 서명이라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리고 전쟁 중에도, 그 이후에도 그의 기만적인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兵者詭道也" — 전쟁이란 본래 속임수의 도(道)다.
─ 孫子 兵法
孫子의 이 명제는 전장(戰場)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협상 테이블도, 언론 앞의 기자회견도, 심지어 G7 만찬장도 — 그 모두가 전쟁의 연장선 위에 놓인 또 다른 전장이다.
二. 광란의 파티 — 주식시장에서 춤을 추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트럼프는 주식시장에서 춤을 췄다. 합의가 다 됐다고 선언하고, 시장이 환호하면 그 숫자를 자신의 업적으로 연출하는 모습을 반복했다. 이란과의 협상이 타결 직전이라는 신호가 나올 때마다 주가는 치솟았고, 석유 가격은 출렁였고, 전 세계 경제는 한 사람의 트윗과 Truth Social 게시글에 놀아났다.
그러나 실제 합의는 번번이 없었다. 호르무즈는 굳게 막혀 있었다. 세계 원유 공급의 20%가 지나는 이 좁은 해협이 봉쇄된 채, 미국과 이란의 쌍방 봉쇄가 계속되는 동안, 물가는 오르고, 기업은 흔들렸다. 미국 국민과 세계의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광란의 파티였다. 그리고 그 파티의 DJ는 트럼프 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 파티의 청구서가 날아오고 있다. 전쟁은 시작했지만 전리품은 없었다. 이란은 무너지지 않았고, 핵 프로그램은 잔해 속에서도 협상 카드로 살아남았으며, 하메네이가 죽었어도 이슬람 공화국 체제는 건재하다. 완전한 핵 포기, 영구적 호르무즈 자유통행, 레바논의 완전한 무장해제 — 이 중 어느 것도 MOU에 담기지 않았다. 전리품 없는 전쟁을 치른 지도자를 기다리는 것은 응원군이 아니다. 국민 여론이라는 이름의 체포조다.
三. 엡스타인의 올가미 — 중간선거의 칼날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이름, 엡스타인 파일이 2026년 들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아직 공식화된 사법 결론은 없다. 그러나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미 다른 계산이 시작되었다.
민주당은 2026년 중간선거를 겨냥한 공세 전략을 가다듬고 있다. 예상되는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다 — 트럼프가 엡스타인 파일의 올가미를 피하기 위해 이란 전쟁을 정치적 연막으로 사용했다는 것.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언론은 전장을 향하고, 국민의 시선은 이란의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전쟁이 승리 없이 협상으로 마무리된 지금, 그 공격 카드의 살상력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
정치는 사실보다 서사로 움직인다. 민주당이 이 서사를 집어들 때, 트럼프에게 필요한 것은 반박이 아니라 — 다른 서사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그 서사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전쟁에서 전리품도 없이 돌아온 지도자를 향해, 중간선거의 총성은 이미 울리기 시작했다.
"民不畏死,奈何以死懼之" —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죽음으로 그들을 위협하겠는가?
─ 老子 道德經 74장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국민을 전쟁이라는 지옥의 묵시록에 내던지면서도 주식시장에서 춤을 추는 장면 — 비판자들은 이를 정의의 가면을 쓴 이기심의 전형으로 본다.
四. 조커 패 — 네타냐후라는 설계된 변수
《스팅》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무대 밖, 어둠 속에서 판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조커. 이번 협상에서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네타냐후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데 이 판의 섬뜩함이 있다. 트럼프가 네타냐후를 협상 테이블 밖에 세운 것은 계산된 포석이다. 이스라엘은 MOU에 서명하지 않았다. 네타냐후는 협상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나는 서명한 적이 없다. 나는 이 합의에 구속되지 않는다. 이 판은 내게 무효다.'
만약 60일의 협상 시한 안에 미국이 만족할 만한 합의를 얻지 못한다면, 혹은 합의가 도출되더라도 그 내용이 이스라엘의 안보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네타냐후는 언제든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레바논 공습 재개, 이란 잔존 핵시설 타격, 헤즈볼라 전면전 — 조커 패는 그렇게 꺼내진다. 그리고 미국은 "동맹 방어"라는 명분 위에 전쟁을 재개한다. 합의를 깨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 조커는 처음부터 무대 밖에 있었으니까.
이것이 이 MOU가 "완전한 합의"가 아닌 "60일의 시험"으로 설계된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합의가 실패해도 전쟁 재개의 명분을 준비해 두는 것. 트럼프에게 조커 패는 협상 카드인 동시에 탈출구다.
그러나 네타냐후를 움직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보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전쟁보다 더 가까이 있는 공포가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 영장, 국내 법원의 부패 혐의 재판 — 그를 향한 사법의 올가미는 트럼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는 이 사법 리스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법정은 멈추고, 비상사태가 지속되는 동안 체포는 유예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민은 이미 그 계산을 읽었다.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 지속된다는 것을 — 이스라엘 국민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 판의 가장 섬뜩한 역설이 있다. 네타냐후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야 한다. 전쟁을 멈추면 법정이 기다리고, 법정을 피하려면 전쟁을 멈출 수 없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이 역설의 구조를 — 그는 스스로 선택했고, 이제 그 구조 안에 갇혀 있다.
"智者之慮,必雜於利害" — 지혜로운 자의 계려(計慮)는 반드시 이로움과 해로움을 함께 헤아린다.
─ 孫子 九變篇
五. 패는 이미 읽혔다 — 국제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이 판의 구조가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민은 네타냐후가 조커 패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미국 국민은 여러 차례의 "합의 임박" 선언이 모두 허언이었음을 기억한다. 국제사회는 주식시장을 볼모로 한 광란의 파티의 청구서를 아직 치르고 있다. 그들의 패는 이미 읽혔다.
영화 《스팅》에서 로니건이 마지막까지 속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스스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는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그러나 2026년의 관객들은 이미 시나리오를 한 번 읽은 사람들이다. 체포조가 올 수도 있고, 응원군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느 쪽도 손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판을 짠 자들이 책임을 피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60일의 협상 시한은 이란과 미국 사이의 시계만이 아니다. 트럼프의 국내 정치 시계이기도 하고, 엡스타인 파일의 봉인이 열리는 시계이기도 하며, 미국 중간선거를 향해 돌아가는 시계이기도 하다. 모든 시계가 동시에 재깍거리고 있다.
"形名參同" — 겉으로 보이는 형(形)과 실제 의도인 명(名)이 일치하는지를 끊임없이 검증하라.
─ 韓非子
결(結) — 舞臺의 幕이 내린 자리에서
"惻隱之心,仁之端也。無惻隱之心,非人也."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다. 측은지심이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 孟子 公孫丑章句上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는 지도자의 말로(末路)를 맹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을 돌리고, 국민을 전쟁의 지옥에 내던지면서도 주식시장에서 춤을 추는 자 — 그는 맹자의 기준으로는 이미 지도자가 아니다.
영화 《스팅》에서 관객은 마지막 장면이 끝날 때까지 진실을 모른다. 그것이 이 영화의 위대함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이란-미국의 대극(大劇)은, 관객인 우리도, 배우들 자신도, 마지막 장면을 모른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훨씬 더 무겁고 위험하다.
먼저 사람을 죽이고, 그 다음 협상을 했다. 협상이 됐다고 주식시장에서 춤을 추고, 세계 경제를 흔들어 놓고, 마지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왔다. 조커를 무대 밖에 세워두고, 합의가 언제든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것이 이 MOU의 진짜 얼굴이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스스로 탐욕의 연기인지 신념의 행동인지 경계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대의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은 영화 관람객이 아니라,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수백만의 이란 국민, 레바논 국민,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 하나에 경제가 출렁이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웃는 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체포조가 올 수도 있고, 응원군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루비콘은 이미 건너졌다. 패는 이미 읽혔다. 이제 남은 것은 — 이 판을 짠 자들이 역사 앞에 어떻게 서게 될 것인가이다.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국민을 지옥에 던진 지도자들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 그것은 60일의 협상이 아니라, 수십 년의 시간이 결정할 것이다.
— 萬頭의 객석, 권두안J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