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한담(閑談)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넘나들다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6-05-2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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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내면의 입체적 조화

불교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화두를 꼽으라면 단연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쟁일 것이다. “단박에 깨쳤으면 이미 모든 것을 성취한 것이므로 더 닦을 것이 없다”는 주장과 “진리를 단박에 깨쳤을지라도 오랜 세월 배어 있는 미세한 습관과 번뇌를 없애기 위해 점진적으로 도를 닦아야 한다”는 주장은 수백 년 동안 평행선을 달리며 수많은 설전을 낳았다.
역사적으로도 이 두 흐름은 거대한 거인들의 발자취로 남아 있다. 고려 시대의 보조지눌(普照知訥) 스님은 해가 떠올라 세상이 환해지더라도 얼어붙은 얼음산이 단숨에 녹지 않듯, 깨달음 뒤의 끊임없는 실천과 정진(돈오점수)을 강조하며 타락했던 당시 불교계를 정화했다.
반면 현대 한국 불교의 거인인 퇴옹성철(退翁性徹)스님은 방에 불을 켜면 어둠이 단박에 사라지듯, 진짜 깨달았다면 더 이상 닦을 것조차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돈오돈수)며 호통을 쳤다. 조금이라도 닦을 것이 남았다면 그것은 진짜 깨달음이 아닌, 어설픈 흉내에 불과하다는 엄격한 기준이었다.
거시와 미시,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교차로 얼핏 보면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거장의 외침을 두고, 나는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두 사상의 대립은 진리의 우열 문제가 아니라, 본질을 바라보는 시선과 탐구 영역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철학적·물리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매우 흥미로운 입체적 구조가 드러난다. 돈오돈수는 거시(巨視)의 세계이자 형이하학적 세계를 온전히 꿰뚫어 볼 때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우주의 근원적 법성(法性)과 절대적 진리의 자리에서는 번뇌도 본래 공(空)한 것이기에 단박에 완전히 성취될 뿐, 더하고 뺄 것이 없다.
반면 돈오점수는 미시(微視)의 세계, 즉 형이상학적 내면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진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 내면 세계를 의미한다. 한 번의 깨달음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습기와 번뇌를 정진하여, 그것을 구체적인 일상과 현실 세계로 온전히 드러내고 실현하는 과정이 바로 돈오점수이다.
결국, 겉으로 본질을 완전하게 깨쳤다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내면의 세계까지 온전히 융합될 수 있도록 도를 정진하는 과정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
이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 과정과 매우 닮아 있다. 고전 물리학의 거시적 시선에서는 우주의 큰 그림이 명쾌하게 보인다. 그러나 탐구를 형이상학적 미시 세계(양자 수준의 보이지 않는 실재)로 깊이 들어가면, 기존의 거시적 법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미세한 움직임과 확률적 실재가 드러난다. 큰 틀에서 물질의 본질을 이해했다고 해서(거시적 깨달음), 그 내부에 숨겨진 미시적 세계의 메커니즘을 다스리는 정진(미시적 실재를 구체적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이 무의미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산과 물, 그리고 《누실명》이 주는 통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했던 성철 스님의 직관적 깨달음은 현상의 본질을 그대로 포착한 거시적 안목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산에는 과연 누가 살고 있는가’, ‘그 물속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관심을 내면의 실질적 가치로 확대한 ‘점수(漸修)’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그의 명문 《누실명(陋室銘)》에서 이러한 현상과 내면의 관계를 기막히게 읊조린 바 있다.
<陋室銘 (누실명) — 劉禹錫 (유우석) 山不在高, 有仙則名. (산부재고, 유선즉명) 산이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요. 水不在深, 有龍則靈. (수부재심, 유룡즉령)물이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아야 신령한 물이다.>
산의 표면적인 높이나 물의 외형적인 깊이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 조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산을 명산으로 만들고 그 물을 신령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에 깃든 ‘신선’과 ‘용’이라는 본질적 가치이다. 돈오돈수가 산의 높음과 물의 깊음을 단박에 알아보는 직관이라면, 돈오점수는 그 산속에 신선이 거하게 하고 물속에 용이 노닐도록 보이지 않는 미시적 내면의 가치를 정진하여 구체적인 현실로 구현해 나가는 발걸음이다.
따라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날카롭게 대립하여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꺾어야 하는 모순의 관계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거시적 본질(형이하학)과 내면에 숨겨진 미시적 가치(형이상학)를 입체적으로 아우르는 하나의 온전한 진리이다.
단박에 깨치고(頓悟), 그 완전한 빛이 일상의 가장 미세한 틈새까지 스며들도록 끝없이 정진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두 거장이 서로 다른 언어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불이(不二)의 경지가 아닐까.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만두의 客席, 권두안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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